오랜 기간 짝사랑을 하며, 그리고 끝내며
그때 느꼈던 점, 그리고 지금 다시 돌아보니 생각나는 점 몇가지.
1. 나는 어장관리 당하고 있었다.
그녀가 수능을 친 날,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빠, 내 수능 망쳤다. 내 인생 똥이다. 끝났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녀를 격려하고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서울 소재 대학으로 왔을때
같이 대학로도 가고 올림픽공원도 갔다.
심지어 내가 도시락도 싸갔다ㅋㅋㅋ
그런 모든 것을 그녀는 즐겼으며, 나랑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그 모든 순간 이미 그녀는 남자친구가 있는 상황이었다
즉 나는 어장관리 당한 것이다.
할 말은 없다. 그녀가 나 좋다고 따라다닌게 아니라 내가 따라다녔으며
첨에는 고백하지 않고 오빠 동생 핑계로 만났으니 말이다.
어장관리를 한 건 그녀지만, 그 어장에 제 발로 간 사람은 나였다ㅋㅋㅋㅋ
2. 그녀의 질척거림
만약 그녀가 나를 가지고 놀 요량으로
남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밍기적 대며 밀당을 하였다면
나는 아마 상사병 혹은 열병에 걸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자의 특성인건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진짜 거짓말처럼, 그녀 생각이 나지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날 가지고 놀지 않고, 확실하게 남친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게
그나마 좀 고마운 포인트였던 것 같다.
여튼 그녀에 대한 마음이 정리되고 나서, 아니 사라지고 나서
나는 대학교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였고
꿈꾸었던 짝사랑이 실패한 대신
너무나도 즐거운 대학교 생활, 동아리 생활을 하였다.
지금도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친구들을 그때 만났다.
그러다가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을 했는데
에잉? 뜬금없이 그녀가 연락이 왔다.
이 머선일이고ㅋㅋㅋㅋㅋ
그런데 또 하필 그날이 무슨날이였냐면
나의 첫사랑 (짝사랑 말고)과 처음으로 데이트 비스무리한 걸 한 날이었다ㅋㅋㅋㅋㅋㅋ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인사동에서 곧 여친이 될 것 같은 사람을 위한 선물을 고르던 타이밍에
짝사랑 그녀가 연락왔다. 몇년만의 연락이 그 타이밍에 오다니...
그런데 그때 내가 뭔가 결심을 한듯
오랫만에 연락온 과거 짝사랑 그녀에게
"내 곧 여친 생길 것 같다. 그래서 프로포즈 때 쓸 선물 사는 중이다."
뭐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문자였는지 전화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난다.)
몇년만의 연락에서 내가 저런 말을 했다는 건
나 이제 여친 생길꺼니까 나 한테 관심 끊어라!! 라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ㅋㅋㅋ
그리고 상대방, 짝사랑 그녀는 좀 당황을 하였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ㅋㅋㅋㅋ
짝사랑 그녀에게 한방 먹이려고 그랬다기 보다는
진짜 연애를 시작할려는 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선포였다. (나는 이제 누군가의 남친이 될 사람이야!! 과거의 짝사랑은 더 이상 신경쓰지마!!!)
3. 그녀의 근황
그녀와는 SNS 친구도 아니고 카톡도 없지만
건너 건너 들은 소식으론 결혼해서 아이들 키우며 살고 있다고....ㅎㅎㅎ
근데 진짜 감흥이 없다ㅎㅎ
나는 내 인생에서 누굴 가장 뜨겁게 좋아했냐고 물으면
짝사랑 그녀라고 답할 것이다.
현재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내이지만
연애나 결혼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그냥 가장 가슴 아리게 사랑했던, 그 사람이 너무 좋아 잠을 못 자고 심지어 고통스러워했을 정도로 좋아했던 대상은
바로 짝사랑 그녀였다.
그건 실제로 그녀가 가장 예쁘고 좋은 여자서가 아니다.
그냥 나의 가장 젊은 날, 20대보다 더 젊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그때 그녀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버렸기 때문에 그런거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는 좋은 사람도, 착한 사람도, 또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10대 한 소년의 눈에는 그녀가 그렇게 보였던 것일 뿐이다.
그때는 그런 걸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렇듯)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운명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생각나고, 이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 40이 넘은 지금 생각해보니, 아니 이미 20대 후반에 벌써 깨달았던 사실은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그냥 10대 소년의 마음에 10대 소녀 한명이 적절한 타이밍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글쎄, 누군가가 "바로 그게 운명이라는 거야!" 라고 말한다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운명이라는 단어를 쓰기엔 생각보다 쉽게 사그라 들었고
후유증이 그렇게 남지도 않았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어쨋든 이런 추억을 가질 수 있게 해준
30년 전 그 소녀에게 이제는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30년전 그 소년, 나에게도 따뜻하게 말해주고 싶다.
그때는 그녀가 내 삶의 이유고, 전부라고 생각했지.
이제는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했던 너 더분에
지금 이렇게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추억이 생겼어.
그런 추억을 남겨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10대의 나에게.
'경주의 추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글로 떠나는 유년 시절 여행 - 16. 고등학교 에피소드 (1) | 2026.07.13 |
|---|---|
| 글로 떠나는 유년 시절 여행 - 14. 뜨거웠던 짝사랑 이야기 2편 (2) | 2026.07.09 |
| 글로 떠나는 유년 시절 여행 - 13. 뜨거웠던 짝사랑 이야기 1편 (0) | 2026.07.08 |
| 글로 떠나는 유년 시절 여행 - 12. 고등학교 입학기 (0) | 2026.07.01 |
| 글로 떠나는 유년 시절 여행 - 11. 어렸을 적 우리 가정 (0) | 2026.06.29 |



